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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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신춘문예 당선평론집은 7개의 신문사에서 선정된 8개의 평론 작품들을 모아서 한 권으로 만든 책입니다. 다양한 주제와 장르에 대한 평론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문학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탐구하며 작품의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이번 신춘문예에 참여한 작품들을 평론가들이 평가하고 분석한 결과물을 담은 이 평론집은 독자들에게 다양한 시각과 해석을 제시합니다. 따라서, 신춘문예에 대한 평론집은 문학적인 가치와 함께 작가들의 성장과 발전을 지원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됩니다.문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와 예비작가들에게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며, 문학적인 이해와 깊이를 추구하는 독자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책입니다. 작품에 대한 평론을 통해 문학적인 감수성을 고취시키고, 작가들의 창작 과정과 의도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2024년 신춘문예 당선 평론작가〉정우주 (경향신문)김상범 (광남일보)민경민 (동아일보)정 원 (문화일보)박민아 (서울신문)김유림 (세계일보)김지연 (조선일보)최의진 (조선일보)
책 속으로
상실의 자리로부터 - 천선란론
정우주
1. 멸종과 박탈 사이
“인간이 망친 세상에서 살면서 인간을 믿는다는 게” (『랑과 나의 사막』, 70) 가능할까.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라는 어느 철학자의 물음을 떠올려 본다. 지구의 한쪽에서는 이상 기후와 플라스틱 쓰레기들로 인해 생명들이 죽어가고, 또 그 반대편 도심의 거리에서는 구멍 난 안전망으로 단시간에 수백에 달하는 죽음들이 발생한다. 이 사건들은 얼핏 각기 다른 차원의 문제로 구분되는 듯 보이지만, 자본주의 속에서 인간이 엉망으로 만든 세계의 끝에 다다랐다는 지점에서 서로 겹쳐진다. 일상적이다 못해 상시적으로 일어나는 죽음과 그에 대한 애도를 빠르게 종결하고 복귀하라는 명령이 짝패처럼 엉겨 있는 이 세계에서, 과연 상실 이후의 삶은 어떻게 모색될 수 있을까.
2022년 10월 29일 벌어진 참사는 또 하나의 사건을 연상케 했다. 물론 이태원과 세월호 사이에는 손쉽게 등치될 수 없는 맥락들이 존재하지만, 참사 1주기를 막 지나온 시점에서 이를 되짚어보는 일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한국문학장에서 세월호 서사는 “살아남은 자의 ‘말할 수 없는’ 언어”로써 침묵의 잠재성을 발굴하는 방식으로 다뤄져 온 한편, 재현불가능성의 건너에서 사건에 대해 “충분히 의식하고 재현할 수 있는” 정교한 언어의 필요성이 요청되기도 했다. 이태원 참사에 이르러 아직 담론의 양상을 뚜렷이 명명할 수는 없다고 해도, 신자유주의 비판과 함께 “그 체제 속에서 숨 쉬고 살았던 개인 주체들”에 천착하는 상실 이후의 서사가 다시금 읽혀야 한다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그리고 여기, 유독 상실의 장면들에서 떠나지 못하고 오래 머무르려는 작가가 있다. 천선란의 소설은 분명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사랑과 우정을 그려내지만, 그 관계맺음이란 무해하고 낭만적인 공존보다는 오히려 선명한 슬픔과 고통을 향해 있다. 특히 사랑했던 대상을 떠나보내고 남겨진 자들이 결코 상실 이전과 똑같아질 수 없음을 뼈아프게 자각하는 순간들은 곧 엉망이 되어버린 세계를 인간의 힘으로 재건하려는 목표가 환상에 불과하다는 목소리와 포개어지며, 상실을 껴안고 살아가는 삶에 대해 상상하도록 한다.
다만 최근의 한국문학에서 인간과 비인간이 논의되는 방식은 이미 한 차례 변화를 겪은 듯하다. 탈인간중심적 전회가 인간의 위치성을 “지상으로 끌어내림으로써” 비인간과의 “긍정적인 연결”을 가능케 하는 것이라 본 관점이 비교적 초기의 흐름이었다면, 이를 전면적으로 반박하는 견해 또한 제출된 바 있다. “인간과 비인간의 공생적 관계라는 당위”는 성급히 윤리성만을 확보하고자 하는 비평적 오독을 낳았으며, 현실에 그어진 “견고한 분할선”으로 인해 낙관적 연대가 어렵게 된다는 요지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오히려 그 ‘지난한’ 지점으로부터 공존이 모색될 수 있음을 말해보는 것은 어떨까. “많은 생물종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도, 정복하지도 않으면서 함께 살아가는, 교란에 기반한 생태”가 바로 천선란 소설 속 세계이다.
원자 폭탄이 떨어진 히로시마 지역에 처음 등장한 생물이 송이버섯이었으며, 산업화 시기 대규모 산림 벌채가 이루어진 민둥산에 소나무가 스스로 싹을 틔웠다. 이토록 불안정한 세계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할 때, ‘그릇된 삶에서 올바른 삶을 이끌어낼 수 있는가’에 대한 아도르노의 망설임은 이제 그 불확정성의 마주침에 기대어 대답해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러니까 “0.01퍼센트는 불가능의 수치와 맞먹는 것일지라도 (…) 그 숫자는 ‘존재한다’”.(『랑과 나의 사막』, 113) 이로써 천선란은 인간이 망친 세상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 그곳에 남은 자들이 삶을 어떻게 일으키는지를 그려낸다.
2. 죽음을 붙잡아두는 힘
천선란 소설 속 인물들은 곁의 누군가를 자꾸만 떠나보낸다. 근작 『이끼숲』에서 지상으로부터 쫓겨나 땅 밑에 지하도시를 건설해 살아가는 인간들은 대부분 죽음의 그림자에 노출되어 있다. 용역업체에 소속되어 경비 일을 하는 마르코와 은희는 매번 약속되지 않은 추가 업무를 하고도 아무런 대가를 받지 못하고, 연구원들과 달리 ‘막일’을 한다는 이유로 카트를 탈 수 없어 휴게시간을 쪼개 걸어서 먼 근무지를 오가야 한다. 차별적인 회사의 태도에 마르코의 선배 커커스는 동료들과 파업을 선언하는데, 이에 마르코와 같이 선택을 유보한 이들이 대타 출근과 초과 근무에 동원된다. 늘어난 업무량에 혹사당하면서도 이전보다 훨씬 늘어난 벌이와 여유로워진 삶에 만족을 느끼던 마르코는 어느 순간 커커스를 마주치고, “자신이 커커스의 숨을 빼앗아 쉬고 있다”(74)는 사실을 목도한다.
이때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기 삶이 유지되고 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마르코조차도, 계약한 월급보다는 많지만 근무 시간에는 훨씬 못 미치는 임금을 받고 있다는 점은 문제적이다. 꼬박꼬박 일을 나가는 마르코도, 반년 넘게 파업을 이어가던 커커스도, 돈이 필요해 아바타에게 목소리를 팔아버린 은희도 전부 ‘살 만한 삶(livable life)’을 위해 노동하지만, 오히려 일을 계속하면 할수록 점점 더 죽음에 가까워진다. 다시 말해, 이들은 모두 “삶을 위해 삶을 버리는”(230) 모순에 처해 있다. 소설의 결말에 이르러 커커스는 끝내 복귀하지 못한 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은희는 언젠가 스스로 예견했던 것처럼 “죽음의 잔해”(50)인 ‘바다눈’이 되어 흩어져 내린다. 결국 떠난 이들을 앞으로 영영 보지 못하리라 직감하는 마르코는 “닫힌 세계”(87)에 홀로 남아 끝없는 상실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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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중에서